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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인들의 전족 (Chinese Women's Foot Binding)

Posted by 에릭대디
2020. 3. 28. 13:23 역사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왕조가 무너진 후 5대 10국시절인 1100년경부터 시작되어 1902년 황제의 칙령으로 금지되기까지 800년이상을 수십억 중국여인들의 40%에 달하는 인원이 3m 길이의 천으로 자신들의 발을 동여매게 되어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던 전족은 외국인들에게 가장 이해하기 힘든 관습이었다. 이상적인 여성의 발모양을 길이 10cm 폭 5cm라고 권장해서 발가락이 발바닥에 완전히 짓눌리고 뒤꿈치가 많이 휘게 되었다. 부모들은 여자아이가 아직 뼈가 유연한 시기인 5살을 전후해서 면으로 발의 옆 측면과 셋째, 넷째 및 새끼 발가락을 안쪽으로 굽어지게 단단히 감아버렸다. 이를 반복하면 그 소녀가 긴 막대기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없이 걷기란 거의 불가능하였고, 전족을 한 여인들은 평생동안 발에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염증에 자구 걸려 무척 고통스러웠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성문화에는 이처럼 조그마한 발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이따금씩 여성의  결혼 지참금은 전족의 크기에 의해 좌우되곤 했다. 또한 아내의 발 모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남편뿐이었다. 중국에서는 여성 매춘부들이 전족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를 제공하는 여장 남자 매춘부들도 전족을 했다.

이 관습에 대한 기원은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가설에 따르면, 11세기 선천적으로 내반족 (발이 아주 작았던) 타키 왕후가 모든 궁정 여성들에게 자신의 발 모양에 따르라고 하는 포고령을 내린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외에 역사학자들은 과거 연꽃 무늬 양탄자 위에서 춤을 추던 궁중의 무희들에게서 그 기원을 찿고 있다. 이런 궁중 무희들을 부러워하던 다른 여성들은 자신들의 발 크기를 줄이려고 애썼다.

이러한 분위기는 점차적으로 전국적인 유행으로 확대되었다. "남편들은 얼굴보다 발 모양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이는 30년간 중국에 머물던 J.J. 마티뇽 박사가 남긴 기록이었다.

전문가들은 비정상적으로 뽀족하게 튀어나온 발과 위로 들려 올라간 뒤꿈치로 인해 허벅지가 발달하면서 엉덩이가 통통해진다고 주장했고, 사람들은 흔히 질 근육이 강화된다고 말했다. 19세기 러시아 주재 중국대사였던 순무한은 "전족을 한 여인들은 질의 근육이 끊임없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런 여인들과 사랑을 나눈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쾌감을 느낀다."라고 주장했다.

전족을 하지 않은 여인들은 미인축에 끼지 못해 결혼조차 힘들었고, 어렵게 시집을 가도 남편으로부터 무시와 냉대를 받고 사회적으로도 이상한 별종으로 여겨져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었다고 전해진다.

남편들의 성적노리개로서 중국여인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고 평생 앉은뱅이의 삷을 강요했던 전족이라는 악습은 마침내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마오쩌뚱에 의해 그 잔재가 소멸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을 시기했던 루이 16세

Posted by 에릭대디
2020. 3. 27. 20:06 역사

미국이 영국과의 힘든 독립전쟁을 치루고 있을 당시, 벤저민 프랭클린은 프랑스로 건너가 평소 영국을 질투하던 루이 16세에게 미합중국 지원을 요청했고 프랑스는 드디어 1778년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그후 영국과 사이가 안좋았던 스페인, 네덜란드도 미국의 편이 되었다. 그 후로도 조잡한 민병대로 이루어진 미국군은 세계 최강의 영국군을 상대로 고전을 계속했고 장기전이 되었다. 1781년 미국군은 영국군을 요크타운에 고립시켰고 이를 구하고자 영국은 체사피크만에 해군을 보냈으나, 프랑스 함대에 대패하고 결국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미국의 독립에 프랑스는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된 것인데,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후에 불어닥친 막대한 전비와 유럽을 휩쓴 자유주의 사상의 전파로 시민혁명이 일어나 루이 16세를 비롯한 많은 귀족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프랑스 주재 초대 미국 대사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과학적인 발명과 뛰어난 언변, 도전적인 태도 덕분에 유럽에서 대단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영국의 전제정치에 맞서 승리를 거둔 평범한 미국 시민 (그는 촛대를 만드는 장인의 10남매중 막내아들이었다.)의 표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기념 메달에서부터 시계에 이르기까지 프랭클린의 모습을 새겨넣은 온갖 형태의 기념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루이 16세는 베르샤유 궁정에서 열린, 세브루(프랑스 센 강가에 위치한 도시)의 왕실장인들이 아름답게 제조한 도자기 전시회에 참관했다. 전시회장을 둘러보던 루이 16세는 당시 영웅으로 추앙을 받던 프랭클린의 초상이 새겨진 기념접시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프랭클린은 하늘에게서 번개를 훔쳐냈고, 전제군주에게서 왕권을 빼앗았다."라는 라틴어 문구가 씌어 있었다.

루이 16세는 화가 치밀었지만, 그 자리에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시녀였던 캉팡이 남긴 말에 따르면, 그가 세브르의 장인들에게 프랭클린의 얼굴과, 군주제를 비난하는 표어를 바닥에 새긴 침실용 변기를 만들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년의 세월이 흐른 1793년에, 프랭클린의 얼굴이 새겨진 침실용 변기속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변으로 가득차 있었고, 루이 16세의 머리가 단두대 아래의 바구니 속으로 떨어지며 그의 폭정도 끝을 맺게 되었다.

가필드 대통령의 죽음

Posted by 에릭대디
2020. 2. 29. 16:03 역사

1881년 7월2일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은 워싱턴 기차역에서 불만을 품은 공무원 찰스 기토의 총에 맞았다.

현장에는 D.W. 블리스 박사가 도착했고, 그는 소독하지 않은 철제 탐침을 사용하여 총알을 찿아내려고 노력했다.

대통령의 부러진 갈비뼈 사이를 헤집고 3인치 깊이로 들어가 그의 몸속을 들쑤셨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고, 블리스는 총알을 찿기 위해 총상 부위에 새끼 손가락을 집어넣었으나 상처는 더욱 커졌다. 환부는 순식간에 검푸른 색으로 변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알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대통령은 백악관으로 옮겨지고 전국에서 유명한 의사들이 총알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다. 그중에는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도 참가했는데 그는 두개의 전기코일이 장착된 금속 탐지기를 사용하여 총알의 위치를 찿는 작업을 거들었다.

처음에 벨과 다른 사람들은 검푸른색을 띠던 환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를 감지했다. 벨은 총알이 더 깊숙이 박혀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사들은 망설였다. 며칠 후 대통령의 체온이 올라가자, 그들은 다시금 환부를 절개하고 깊은 곳까지 파헤쳤으나 총알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가필드 대통령은 1881년 9월 19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시신을 해부한 결과, 총알은 검푸른색 환부의 10인치 깊이에서 피막에 둘러싸인채 발견되었다.

일부 의학 역사학자들은 총알이 그대로 그 부위에 박혀 있었더라면 가필드 대통령은 생존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고열과 장기간 침대에서 지내며 쇠약해진 그의 육체는 소독되지 않은 탐침에 의한 감염을 견뎌낼 수 없었다.

1860년대 후반에 영국의 조지프 라스터는 소독약을 사용하는 수술기법을 최초로 시도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가필드 대통령을 치료했던 미국의 의사들은 라스터의 기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그당시 벨이 사용했던 금속탐지기가 후일 지뢰탐지기로 활용되었을 뿐이다.

실크로드

Posted by 에릭대디
2019. 6. 9. 09:00 역사

'비단길 (Silk Road)'이라고 하는 실크로드는 중앙아시아의 사막 곳곳에 산재하는 오아시스 도시를 따라 유라시아의 동서를 잇는 대교역로이다. 고대 중국과 서역 각국 간에 비단을 비롯한 여러가지 무역을 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를 잇는 길이었는데 총길이 6,400킬로미터에 달하는 실크로드라는 말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1877년 쓴 중국 (China)에서 최초로 사용된 말이다. 비단은 중국의 주요특산품이었는데, 대량의 비단이 낙타등에 실려 실크로드를 따라 동에서 서로 운반되었다. 그래서 리히트호펜은 서역으로 통하는 대상로를 '비단길'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그의 제자인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이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어 중앙아시아, 이란 고원을 가로질러 이라크, 시리아에서 로마에 이르는 교역로 전체를 실크로드라고 부르게 되었다.  옛날 로마인들은 동쪽 어딘가에 황금 섬 (중국)이 있다고 믿었고, 중국 또한 서역에 대해 항상 궁금해 했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은 BC 100년까지도 서로간에 직접 교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과 같은 자연 방해물과 아립인들의 방해 때문이었다. 이 길을 주로 왕래한 것은 소그디아나 지방 (서 투르키스탄)의 소그드 상인이었다. 그들이 세운 사마르칸트, 부하르 등의 도시를 기점으로 실크로드는 뻗어나갔다. 중국상인들이 실크로드의 존재를 알게된 것은 전한의 무제가 흉노에 의해 서역으로 쫒겨난 대월지, 오손 같은 나라와 동맹하여 중국 북방 변경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사역에 파견한 장건과 그 수행원들에 의해서다. 한 무제는 군사를 보내 서역을 확보하고 이때부터 중국의 비단은 본격적으로 로마까지 팔려나갔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기린, 사자, 말등이 전해졌고 오이, 시금치, 포도, 멜론, 완두콩, 호두, 마늘등도 전래되었는데 중국에서는 비단, 칠기, 도자기등의 물품과 양잠, 화약,제지 기술등이 서역으로 건너갔고 특히 종이 만드는 기술은 중세 유럽의 암흑기를 밝혀 인쇄술 발달과 지식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 돈황을 비롯한 4군데에 요새를 세워 서역을 통하는 실크로드를 소통하게 하였는데 1년에 5-10번씩 장사꾼들이 오갔다.

실크로드는 상업적인 면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의 교류라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데 중국에서는 많은 스님들이 경전을 구하러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로 갔고, 인도에서는 승려들이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많이 들어와서 중국 불교가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도 파키스탄과 중국 신강 자치구를 잇는 포장도로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프랑스 혁명과 왕비 앙투아네트에 대한 오해

Posted by 에릭대디
2019. 6. 8. 14:42 역사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당시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상황으로 그동안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려고 루이 오귀스트 (루이 16세가 된 인물)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나 왕비로 재위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38살에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외국인으로 프랑스어를 익히는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공식문서의 철자 맞춤법도 간간히 틀려서 지적을 어러번 받기도 했고 앙숙이었던 적국출신의 왕비라는 이유로 많은 형제와 아들들을 잃었던 프랑스인들 대부분에게서 적대감을 받았다.

미국의 독립전쟁에 20억 리브르라는 막대한 자금을 원조해서 국고가 거의 바닥이 나있었고 선대인 루이 14세부터 시작된 베르사유 궁전의 건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으로 프랑스 재정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앙시앙 레짐이라 불리던 구체제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도 절정에 달해 있었다. 혁명전에 성직자와 귀족신분이 아닌 제 3의 신분인 평민은 경제를 지탱하고 있었지만 정치에는 전혀 참여할 수 없었다.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자유, 평등의 이념이 프랑스 평민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고 1788년 흉작으로 빵값이 폭등하면서 평민들의 생활은 아주 어려워졌다.

1789년 루이 16세는 삼부회 (성직자, 귀족, 평민 출신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신분제 의회)의 소집을 결정했으나 특권층이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의결방식을 요구했고, 제 3의 신분인 평민은 국민의회를 결성했으나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한 정부의 조치에 시민들의 분노가 과열되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이때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이 말은 앙투아네트가 혁명이 일어났을때 시민들에게 한 말이 아니고 원래 거리에서 굶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신하에게 "저 아이들에게 브리오 슈를 주세요" 였지만 혁명군은 의도적으로 이를 왜곡해서 퍼뜨렸다. 프랑스 혁명후 1793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혁명세력은 프랑스 국민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던 그녀를 성적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조작했으며, 여성의 정치참여를 막기위해 왕비를 이용하여 도덕적 타락으로 몰고 간 것이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두 나라의 화해와 동맹을 위해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로 왔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라는 죄를 뒤집어 쓴채 베르사이유의 장미라고 불리던 그녀는 단두대에서 생을 다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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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발상지가 된 이유

Posted by 에릭대디
2019. 5. 5. 09:00 역사

신곡을 쓴 단테, 최후의 만찬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 천지 창조와 최후의 만찬을 만든 미켈란젤로,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등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은 유명한 예술가, 사상가들이 줄줄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이탈리아를 발상지로 하는 '르네상스 Renaissance - 프랑스어로 재생이라는 의미, 인간성 해방을 위한 인문주의 운동'는 유럽 각국에 확산되어 세계적인 유행을 일으켰다. 르네상스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교리에 억압되어 있던 시대에 종교보다는 현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이 확산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 로마의 학문과 지식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부각되었고 개인의 자유와 가치를 자각하게 되어 사람들은 정신적인 해방을 맛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 문화운동의 기본적인 흐름이 된 것이다. 이탈리아가 르네상스를 이끌게 된 이유는 각지에 산재된 고대 로마의 문화유산이 있었으며,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동방교역을 통해 다른 문화와 접할 기회가 많았고, 비잔틴과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던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화와 그 당시 최첨단 기술을 빠르게 도입할 수 있었던 것에 기인한다. 특히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에 이은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다음에는 이탈리아로 망명한 학자들에 의해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화가 다시 이탈리아로 흘러들어 오게 되었다. 그당시 이탈리아는 각각의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어서 교회의 권력에 대항하려는 풍조가 강했고,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가문들이 이를 후원했다. 이러한 여러 조건들이 결합되어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먼저 시작되고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되어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를 통해 고전학문의 가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신대륙의 발견, 지동설의 등장, 봉건제의 몰락, 상업의 송방, 종이 / 인쇄술 / 항해술 / 화약과 같은 신기술의 발명이 이루어져 근대 유럽문명을 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르네상스 시기는 1527년 로마의 몰락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르네상스 정신을 표현하는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이탈리아 북부와 북유럽에서 계속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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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시와 리바이스 청바지

Posted by 에릭대디
2019. 5. 4. 13:34 역사

1848년 1월 24일 캘리포니아 농장의 공사현장 책임자였던 제임스 마샬은 우연히 강에서 사금을 발견하였다. 그때는 캘리포니아가 멕시코로부터 미국령이 된지 얼마안된 시기였고 주만이라고 해봤자 원래살던 원주민인 인디언과 이리저리 흘러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계속 퍼져나갔고 일확천금의 꿈을 찿아 미전역 아니 세계 각국에서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골드러시로 도착하는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라틴 아메리카,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및 아시아등지의 사람들도 유입되었다. 특히 1849년에 폭발적으로 켈리포니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 (약 8만여명이라 추산) 그들은 '포티 나이너스 49ers (49년도의 사람들)' 라 불렀다.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프로 미식축구팀의 이름인 '포티 나이너스'는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1850년에는 늘어난 인구덕분에 켈리포니아는 주로 지정될 수 있었다. 골드러시 Gold Rush로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1852년 20만여명에 달했고 불모지와 다름없던 땅들이 비약적으로 개발되기 시작되었다. 샌프란시스코가 미국의 주요대도시로 된 것은 골드러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확천금의 꿈을 찿아 몰려온 사람들중에서 그 꿈을 이룬 사람들은 드물었다. 초기에 채굴자들은 선광 냄비와 같이 단순한 기술로 강바닥의 사금을 찿았고 후에는 금맥을 찿기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게 되어 개인보다는 회사 조직의 광산개발 비율이 높아졌다. 오늘날의 시세로 수십억 달러의 금이 발견되어 극소수의 사람들은 막대한 부를 가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왔을때와 다를 바 없는 상태로 고향에 돌아갔다.

이때 큰돈을 번 사람들은 금을 캐던 광부가 아니고 오히여 이들은 상대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거리의 술집이나 여관 주인, 양동이와 소쿠리등 사금 채취도구를 판매하던 상인들이었는데 이들도 동업자들간의 경쟁이 치열해져서 실제로 돈을 번 사람들은 극히 일부였다. 이들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람은 청바지를 만든 리바이스 스트라우스 Levis Strauss였다. 1853년 당시 유태계 독일인이었던 그는 바이에른 출신으로 텐트를 만드는데 사용할 천을 제작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직원들과 함께 상당한 물량의 천을 만들었다. 그런데 한 직원의 실수로 의뢰인이 요구하지도 않은 파란색 염료로 천을 염색해버렸다. 당연히 의뢰인은 구매를 취소했고 그는 파란색 천의 엄청난 재고로 고민하다가 당시 금을 캐던 광부들이 입고있었던 바지들이 잘 찢어진다는 것을 듣고, 튼튼하고 질긴 그의 파란색 천으로 바지를 만들었다. 비교적 저렴하고 질겼던 그의 청바지는 광부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어 리바이스 Levi's라는 브랜드로 오늘날까지 전세계 남녀노소 모두에게 팔리고 있다.

바이킹과 그린랜드

Posted by 에릭대디
2019. 4. 28. 16:13 역사

오늘날의 스웨덴, 노르웨이와 덴마크인들은 바이킹의 후손이다. 본래 그들은 북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스칸디나비아 연안이 삶의 터전이었다. 혹독한 자연 환경때문에 생계가 어려웠던 바이킹은 생활의 안정을 위해 약탈에 나섰고 영국,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 해안등을 습격해 보물과 식량을 빼앗고, 나중에는 이탈리아까지 쳐들어갔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납치해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으며, 상당수의 포로는 노예시장에 내다 팔았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바이킹은 무슨 일이든지 했다. 8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중반에 걸쳐, 바이킹은 유럽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침입자였다. 793년 바이킹이 탄 용선이 처음으로 영국 해안에 나타나서, 린디스판 수도원이 침략했다. 그들은 다른 유럽인들보다 키가 크고, 과감하고 잔인했다. 그들의 위력은 협동에서 비롯됐다.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라 전사들이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용머리가 장식된 배를 타고 죽음의 바다로 나갔다. 위험한 항해였지만, 바이킹의 용선은 당대의 어느 선박보다 빠르고 균형잡힌 배였다. 그들은 돛대를 마음대로 세웠다 눕힐 수 있었고, 돛의 방향도 마음대로 바꿨다. 그러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강의 상류에 이르러 물줄기가 끊어져도 바이킹은 항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름칠한 통나무를 땅바닥에 깔았다. 그위로 용선을 조금씩 밀었다. 이렇게 수십 킬로미터의 숲길을 헤쳐 나갔다. 또 다른 물줄기가 나올 때까지 계속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강한 용기와 신념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부하들의 단결심과 복종심도 이에 못지 않았다.

자연환경이 척박하고 겨울철이 긴 관계로, 바이킹은 짜디짠 저장식품에 의존했다. 식품은 주로 수렵이나 채집을 통해 마련했다. 사냥에서 잡은 순록과 사슴 또는 바다에서 잡은 연어와 청어 등이었다. 여기에 숲에서 채집한 다양한 딸기 (베리류)및 버섯류가 추가되었다. 바이킹 시대에도 풍성하게 차린 식탁이 있었다. 바다 멀리 나갔다 온 바이킹들을 위해 고향에 돌아와서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덜어먹으라는 축제를 열었는데 이것이 바로 '스머르고스보르드' - 뷔페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바이킹에게는 농토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농경지를 확보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그들은 새로 발견한 거대한 지역의 이름을 '그린랜드'라고 불렀다. 시실 그곳에는 녹색의 초지가 없었다. 그러나 농경의 꿈을 지닌 이주민들을 많이 모으려고 '녹색의 땅'이라는 이름을 붙혔다. 속임수라고 비웃기에는 그들의 소망이 너무도 절실했다.

부족 구성원 회의에서 평등한 권리와 사회적 합의를 존중했던 바이킹, 부족장은 대외활동이 편리한 여름철에 전사들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약탈을 하거나 다른 국가와의 교역에 종사하느라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부족장이 없는 동안에 부족장의 아내가 부족장을 대신하여 통치권을 행사한 독특한 사회구조였다. 이러한 그들의 전통속에서 발전된 '평등'사상은 근대 시민사회의 중심개념이 되어 현재의 복지국가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다.

잉카제국과 티티카카 호수

Posted by 에릭대디
2019. 2. 24. 09:00 역사

잉카 제국은 태양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제국의 황제칭호를 사파 잉카(Sapa Inca, 유일한 왕이라는 뜻)로 불렀던 것에 잉카제국으로 알려졌다. 자신들을 '태양의 신'의 후예로 여기고 태양 sol을 숭배했다. 제국 곳곳에 태양신을 섬기는 신전을 짓고 제물을 바쳤다. 잉카 제국은 1200년대 중반 페루의 티티카카 호수 인근의 고지대에 정착했다. 1438년부터 1533년까지 95년 동안 북쪽의 콜롬비아로부터 남쪽 칠레 중부 그리고 태평양에서 안데스 전역에 걸친 1600만여명의 대제국을 이루었고 그들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처럼 백만명 이상의 잉카인들이 화려한 잉카문명을 이루었던 곳이다.

16세기 초반 처음으로 서양인들을 만난 잉카인들은 하얀 피부의 백인인 스페인 사람들이 전설속에서 그들을 구원해 줄 영웅이라 믿었고 환대하였으며 그들이 가진 모든 것들을 내주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약탈과 유린, 부족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계략을 사용하여 잉카문명을 멸망시켰다. 역사가들이 내세우는 학설에 의하면 북미의 인디언, 남미의 잉카, 그리고 멕시코의 아즈텍 문명이 사라지게 된 것이 백인들과 함께 들어온 전염병으로 보고 있다. 백인들이 퍼뜨린 천연두나 홍역 그리고 인플루엔자등의 전염병들이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온 원주민들을 몰살시켰다는 것이다.

잉카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8만명의 잉카군이 있었지만 상대가 병력이 너무 적어 무시했는지 2000명의 무장하지 않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피사로와 만났다.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고 스페인의 국왕을 섬기는 것을 거부한 황제는 겨우 180명의 군인들을 이끈 피사로에게 사로잡히고 비무장한 수행원들과 후위의 무장한 인디언들은 더 이상 저항할 것을 포기하고 7000여명이 학살을 당했다.  황제가 머물던 방을 엄청난 황금과 보석을 채우면 황제를 석방한다는 약속을 믿고 잉카인들은 2달만에 채웠지만 결국 황제는 죽임을 당한다. 태양신을 모시던 신전들은 허물어져고 그 자리에 성당과 수도원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찬란했던 잉카 문명은 안데스 산맥에 그 유적지만 남긴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피사로는 잉카제국을 스페인의 식민지로 삼고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했으나 황금에 눈이 먼 내부의 반란으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페루에서는 매년 6월24일에 인티라이미 Inti Raymi라는 태양제가 열린다. 잉카 제국을 세운 망코 카팍은 전설상의 인물이다. 망코 카팍과 그의 형제자매들은 태양의 신 인티 Inti에 의해 티티카카 호수로 보내졌다. 그들이 수면으로 등장해 태양의 섬 Isla Del Sol에 정착했다. 이에 태양의 신을 숭배하기 위해 태양의 신전을 만들었다.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 위치한 '티티카카'는 잉카 문명의 발상지로 먼 옛날에 바다였는데 지각변동으로 해변이 융기되어 호수가 되었다. 해발 3,812미터로 '하늘호수'라 불리는 티티카카는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8,300여 킬로미터로 전라북도보다 크다.) 원주민 언어로 '티티'는 신성한 동물 '퓨마'이고 '카카'는 '바위'를 의미한다. 상공에서 이 지역을 내려다보면 마치 퓨마가 토끼를 사냥하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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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키에 대한 오해와 진실

Posted by 에릭대디
2019. 2. 23. 10:27 역사

나폴레옹은 1769년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다. 해군장교가 되고 싶었지만 식민지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할 때에도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병이나 보병장교가 되지 못했고 포병장교가 되었다. 계속되는 승전으로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높여주면서 국민들의 인기를 얻어 종신통령에 이어 국민투표에 의해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다.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을 보면 나폴레옹은 옥좌에 앉아 있지만 그의 두다리는 바닥에 깐 융단위에 붕 떠 있는 곳으로 나온다. 얼마나 키가 작았으면 그렇게 그렸을까? 그러나 실제로 나폴레옹의 키는 그처럼 작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남자들의 보통키인 164센티미터였는데 오히려 이들보다 큰 편이었다. 나폴레옹의 황실 근위병들은 프랑스의 정예부대였으며 그들의 체격은 당시 성인 남성의 평균 체격을 크게 웃돌았다. 체격 좋은 황실 근위병들에 파묻혀있던 나폴레옹은 상대적으로 키가 작아 보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키가 작다고 결정적으로 알려진 데는 그의 부검때 퍼진 소문 때문이었다. 영국에 경제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시행했는데 이를 어긴 러시아를 응징하고자 감행한 러시아 원정이 추위와 러시아군의 초토화 퇴각으로 실패한 후에 몰락하여 엘바섬으로 귀양을 갔었다.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와서 복위하였지만, 마침내 벨기에의 워털루 전쟁에서 패해서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된 나폴레옹은 1821년 사망했는데 그를 부검한 의사, 프란체스코 안토마치는 나폴레옹의 키가 158 센티미터 였다고 밝혔다. 부검의는 나폴레옹의 신장을 옛 프랑스 측량단위인 피에 (Pied)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를 영미식 측량단위인 피트로 착각해서 158 센티미터 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옛날 프랑스에서 쓰이던 '피에'의 길이는 지금의 영미식 피트의 길이와는 차이가 난다. 1 '피에'는 1 '피트'보다 2 센티미터 더 길다. 즉 옛날 프랑스 측량 제도하에서의 5피에 2인치는 영미식으로 환산하면 5피트 6인치 (169 센티미터가 된다)에 해당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측량 단위로 계산된 나폴레옹의 키가 영국의 피트 단위로 잘못 전달되면서 169 센티미터인 나폴레옹이 무려 11 센티미터나 키가 작아지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의 삼각모를 넓게 쓰던 버릇과 그의 몸매가 배가 약간 나왔고 다리가 짧은 편이었으며 그를 호위하던 근위병들의 큰 키로 상대적으로 작아보이던 나폴레옹에 대한 인상과 그의 사후 부검의의 잘못된 기록으로 그의 키가 작았다는 오해가 세상에 퍼진 것이다.

'나폴레옹 컴플렉스'는 말이 있다. 키가 작은 사람들이 보상심리로 공격적이고 과장된 심리를 의미하는데 키가 작다고 알려진 나폴레옹에서 유래되었다. 나폴레옹이 작은 키의 오해로 키가 작은 남자들의 열등감을 해소하는데 많이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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