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필드 대통령의 죽음
1881년 7월2일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은 워싱턴 기차역에서 불만을 품은 공무원 찰스 기토의 총에 맞았다.
현장에는 D.W. 블리스 박사가 도착했고, 그는 소독하지 않은 철제 탐침을 사용하여 총알을 찿아내려고 노력했다.
대통령의 부러진 갈비뼈 사이를 헤집고 3인치 깊이로 들어가 그의 몸속을 들쑤셨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고, 블리스는 총알을 찿기 위해 총상 부위에 새끼 손가락을 집어넣었으나 상처는 더욱 커졌다. 환부는 순식간에 검푸른 색으로 변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알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대통령은 백악관으로 옮겨지고 전국에서 유명한 의사들이 총알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다. 그중에는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도 참가했는데 그는 두개의 전기코일이 장착된 금속 탐지기를 사용하여 총알의 위치를 찿는 작업을 거들었다.
처음에 벨과 다른 사람들은 검푸른색을 띠던 환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를 감지했다. 벨은 총알이 더 깊숙이 박혀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사들은 망설였다. 며칠 후 대통령의 체온이 올라가자, 그들은 다시금 환부를 절개하고 깊은 곳까지 파헤쳤으나 총알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가필드 대통령은 1881년 9월 19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시신을 해부한 결과, 총알은 검푸른색 환부의 10인치 깊이에서 피막에 둘러싸인채 발견되었다.
일부 의학 역사학자들은 총알이 그대로 그 부위에 박혀 있었더라면 가필드 대통령은 생존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고열과 장기간 침대에서 지내며 쇠약해진 그의 육체는 소독되지 않은 탐침에 의한 감염을 견뎌낼 수 없었다.
1860년대 후반에 영국의 조지프 라스터는 소독약을 사용하는 수술기법을 최초로 시도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가필드 대통령을 치료했던 미국의 의사들은 라스터의 기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그당시 벨이 사용했던 금속탐지기가 후일 지뢰탐지기로 활용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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