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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인들의 전족 (Chinese Women's Foot Binding)

Posted by 에릭대디
2020. 3. 28. 13:23 역사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왕조가 무너진 후 5대 10국시절인 1100년경부터 시작되어 1902년 황제의 칙령으로 금지되기까지 800년이상을 수십억 중국여인들의 40%에 달하는 인원이 3m 길이의 천으로 자신들의 발을 동여매게 되어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던 전족은 외국인들에게 가장 이해하기 힘든 관습이었다. 이상적인 여성의 발모양을 길이 10cm 폭 5cm라고 권장해서 발가락이 발바닥에 완전히 짓눌리고 뒤꿈치가 많이 휘게 되었다. 부모들은 여자아이가 아직 뼈가 유연한 시기인 5살을 전후해서 면으로 발의 옆 측면과 셋째, 넷째 및 새끼 발가락을 안쪽으로 굽어지게 단단히 감아버렸다. 이를 반복하면 그 소녀가 긴 막대기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없이 걷기란 거의 불가능하였고, 전족을 한 여인들은 평생동안 발에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염증에 자구 걸려 무척 고통스러웠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성문화에는 이처럼 조그마한 발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이따금씩 여성의  결혼 지참금은 전족의 크기에 의해 좌우되곤 했다. 또한 아내의 발 모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남편뿐이었다. 중국에서는 여성 매춘부들이 전족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를 제공하는 여장 남자 매춘부들도 전족을 했다.

이 관습에 대한 기원은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가설에 따르면, 11세기 선천적으로 내반족 (발이 아주 작았던) 타키 왕후가 모든 궁정 여성들에게 자신의 발 모양에 따르라고 하는 포고령을 내린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외에 역사학자들은 과거 연꽃 무늬 양탄자 위에서 춤을 추던 궁중의 무희들에게서 그 기원을 찿고 있다. 이런 궁중 무희들을 부러워하던 다른 여성들은 자신들의 발 크기를 줄이려고 애썼다.

이러한 분위기는 점차적으로 전국적인 유행으로 확대되었다. "남편들은 얼굴보다 발 모양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이는 30년간 중국에 머물던 J.J. 마티뇽 박사가 남긴 기록이었다.

전문가들은 비정상적으로 뽀족하게 튀어나온 발과 위로 들려 올라간 뒤꿈치로 인해 허벅지가 발달하면서 엉덩이가 통통해진다고 주장했고, 사람들은 흔히 질 근육이 강화된다고 말했다. 19세기 러시아 주재 중국대사였던 순무한은 "전족을 한 여인들은 질의 근육이 끊임없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런 여인들과 사랑을 나눈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쾌감을 느낀다."라고 주장했다.

전족을 하지 않은 여인들은 미인축에 끼지 못해 결혼조차 힘들었고, 어렵게 시집을 가도 남편으로부터 무시와 냉대를 받고 사회적으로도 이상한 별종으로 여겨져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었다고 전해진다.

남편들의 성적노리개로서 중국여인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고 평생 앉은뱅이의 삷을 강요했던 전족이라는 악습은 마침내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마오쩌뚱에 의해 그 잔재가 소멸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을 시기했던 루이 16세

Posted by 에릭대디
2020. 3. 27. 20:06 역사

미국이 영국과의 힘든 독립전쟁을 치루고 있을 당시, 벤저민 프랭클린은 프랑스로 건너가 평소 영국을 질투하던 루이 16세에게 미합중국 지원을 요청했고 프랑스는 드디어 1778년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그후 영국과 사이가 안좋았던 스페인, 네덜란드도 미국의 편이 되었다. 그 후로도 조잡한 민병대로 이루어진 미국군은 세계 최강의 영국군을 상대로 고전을 계속했고 장기전이 되었다. 1781년 미국군은 영국군을 요크타운에 고립시켰고 이를 구하고자 영국은 체사피크만에 해군을 보냈으나, 프랑스 함대에 대패하고 결국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미국의 독립에 프랑스는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된 것인데,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후에 불어닥친 막대한 전비와 유럽을 휩쓴 자유주의 사상의 전파로 시민혁명이 일어나 루이 16세를 비롯한 많은 귀족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프랑스 주재 초대 미국 대사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과학적인 발명과 뛰어난 언변, 도전적인 태도 덕분에 유럽에서 대단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영국의 전제정치에 맞서 승리를 거둔 평범한 미국 시민 (그는 촛대를 만드는 장인의 10남매중 막내아들이었다.)의 표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기념 메달에서부터 시계에 이르기까지 프랭클린의 모습을 새겨넣은 온갖 형태의 기념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루이 16세는 베르샤유 궁정에서 열린, 세브루(프랑스 센 강가에 위치한 도시)의 왕실장인들이 아름답게 제조한 도자기 전시회에 참관했다. 전시회장을 둘러보던 루이 16세는 당시 영웅으로 추앙을 받던 프랭클린의 초상이 새겨진 기념접시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프랭클린은 하늘에게서 번개를 훔쳐냈고, 전제군주에게서 왕권을 빼앗았다."라는 라틴어 문구가 씌어 있었다.

루이 16세는 화가 치밀었지만, 그 자리에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시녀였던 캉팡이 남긴 말에 따르면, 그가 세브르의 장인들에게 프랭클린의 얼굴과, 군주제를 비난하는 표어를 바닥에 새긴 침실용 변기를 만들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년의 세월이 흐른 1793년에, 프랭클린의 얼굴이 새겨진 침실용 변기속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변으로 가득차 있었고, 루이 16세의 머리가 단두대 아래의 바구니 속으로 떨어지며 그의 폭정도 끝을 맺게 되었다.

가필드 대통령의 죽음

Posted by 에릭대디
2020. 2. 29. 16:03 역사

1881년 7월2일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은 워싱턴 기차역에서 불만을 품은 공무원 찰스 기토의 총에 맞았다.

현장에는 D.W. 블리스 박사가 도착했고, 그는 소독하지 않은 철제 탐침을 사용하여 총알을 찿아내려고 노력했다.

대통령의 부러진 갈비뼈 사이를 헤집고 3인치 깊이로 들어가 그의 몸속을 들쑤셨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고, 블리스는 총알을 찿기 위해 총상 부위에 새끼 손가락을 집어넣었으나 상처는 더욱 커졌다. 환부는 순식간에 검푸른 색으로 변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알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대통령은 백악관으로 옮겨지고 전국에서 유명한 의사들이 총알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다. 그중에는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도 참가했는데 그는 두개의 전기코일이 장착된 금속 탐지기를 사용하여 총알의 위치를 찿는 작업을 거들었다.

처음에 벨과 다른 사람들은 검푸른색을 띠던 환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를 감지했다. 벨은 총알이 더 깊숙이 박혀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사들은 망설였다. 며칠 후 대통령의 체온이 올라가자, 그들은 다시금 환부를 절개하고 깊은 곳까지 파헤쳤으나 총알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가필드 대통령은 1881년 9월 19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시신을 해부한 결과, 총알은 검푸른색 환부의 10인치 깊이에서 피막에 둘러싸인채 발견되었다.

일부 의학 역사학자들은 총알이 그대로 그 부위에 박혀 있었더라면 가필드 대통령은 생존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고열과 장기간 침대에서 지내며 쇠약해진 그의 육체는 소독되지 않은 탐침에 의한 감염을 견뎌낼 수 없었다.

1860년대 후반에 영국의 조지프 라스터는 소독약을 사용하는 수술기법을 최초로 시도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가필드 대통령을 치료했던 미국의 의사들은 라스터의 기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그당시 벨이 사용했던 금속탐지기가 후일 지뢰탐지기로 활용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