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러시와 리바이스 청바지 :: 누리마루

골드러시와 리바이스 청바지

Posted by 에릭대디
2019. 5. 4. 13:34 역사

1848년 1월 24일 캘리포니아 농장의 공사현장 책임자였던 제임스 마샬은 우연히 강에서 사금을 발견하였다. 그때는 캘리포니아가 멕시코로부터 미국령이 된지 얼마안된 시기였고 주만이라고 해봤자 원래살던 원주민인 인디언과 이리저리 흘러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계속 퍼져나갔고 일확천금의 꿈을 찿아 미전역 아니 세계 각국에서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골드러시로 도착하는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라틴 아메리카,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및 아시아등지의 사람들도 유입되었다. 특히 1849년에 폭발적으로 켈리포니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 (약 8만여명이라 추산) 그들은 '포티 나이너스 49ers (49년도의 사람들)' 라 불렀다.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프로 미식축구팀의 이름인 '포티 나이너스'는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1850년에는 늘어난 인구덕분에 켈리포니아는 주로 지정될 수 있었다. 골드러시 Gold Rush로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1852년 20만여명에 달했고 불모지와 다름없던 땅들이 비약적으로 개발되기 시작되었다. 샌프란시스코가 미국의 주요대도시로 된 것은 골드러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확천금의 꿈을 찿아 몰려온 사람들중에서 그 꿈을 이룬 사람들은 드물었다. 초기에 채굴자들은 선광 냄비와 같이 단순한 기술로 강바닥의 사금을 찿았고 후에는 금맥을 찿기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게 되어 개인보다는 회사 조직의 광산개발 비율이 높아졌다. 오늘날의 시세로 수십억 달러의 금이 발견되어 극소수의 사람들은 막대한 부를 가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왔을때와 다를 바 없는 상태로 고향에 돌아갔다.

이때 큰돈을 번 사람들은 금을 캐던 광부가 아니고 오히여 이들은 상대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거리의 술집이나 여관 주인, 양동이와 소쿠리등 사금 채취도구를 판매하던 상인들이었는데 이들도 동업자들간의 경쟁이 치열해져서 실제로 돈을 번 사람들은 극히 일부였다. 이들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람은 청바지를 만든 리바이스 스트라우스 Levis Strauss였다. 1853년 당시 유태계 독일인이었던 그는 바이에른 출신으로 텐트를 만드는데 사용할 천을 제작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직원들과 함께 상당한 물량의 천을 만들었다. 그런데 한 직원의 실수로 의뢰인이 요구하지도 않은 파란색 염료로 천을 염색해버렸다. 당연히 의뢰인은 구매를 취소했고 그는 파란색 천의 엄청난 재고로 고민하다가 당시 금을 캐던 광부들이 입고있었던 바지들이 잘 찢어진다는 것을 듣고, 튼튼하고 질긴 그의 파란색 천으로 바지를 만들었다. 비교적 저렴하고 질겼던 그의 청바지는 광부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어 리바이스 Levi's라는 브랜드로 오늘날까지 전세계 남녀노소 모두에게 팔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