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럽 인종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갖지 않았는가?
유럽에 사는 백인종 중 순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굳이 현생 인류를 대별하자면, 유럽, 서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코카소이드(Caucasoid)’, 동아시아의 몽골로이드, 그리고 아프리카의 니그로이드로 분류할 수 있겠는데, 16세기 이후 세계 곳곳을 정복하고 숱한 잡종을 양산한 코카소이드는,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카프카스 산맥이 그 발원지라고 합니다.
그들의 피부가 창백하고 회, 청, 녹색의 홍채와 금갈색에서 파생된 다채로운 터럭을 갖게 된 것은 자외선을 덜 쐴 수밖에 없는 지역적, 기후적 특성에 기인한 돌연변이 때문일 것입니다.
코카소이드는 아리안, 셈·햄족으로 나뉘는데, 튜턴족, 라틴족, 슬라브족, 켈트족, 그리스·알바니아족, 힌두족은 아리안 계이고, 아랍, 유대와 에티오피아는 셈족, 그리고 이집트와 베르베르는 햄족입니다.
노린내가 많이 나는 이 돌연변이의 후손들은 무척 사나워서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서아시아에 걸쳐 고대에서 현대까지 치고 박고 싸우기를 수천 년 동안 계속하였습니다.
어릴 때 맞고 큰 아이들이 폭력적이듯이 이 ‘흰피부인간’들은 싸움질에 이골이 난 유전자를 갖게 되었으며,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권력이라는 뼈대를 세워 몸집을 불려 텃세를 부리고, 종교와 사상을 빙자하여 약한 집단을 쳐서 한껏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류의 발달 과정은 더 갖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 위해 다른 집단을 침범하고 약탈해 온 ‘전쟁의 역사’에 다름 아닙니다.
우세한 종족들일수록 먹고 살아남기 위해서 타 집단의 가진 것을 더 잘 빼앗을 줄 알았고, 자신의 씨를 더 많이 퍼뜨리고자 때로는 무자비하게 약한 집단을 절멸시키거나 종으로 삼고 여성을 취했습니다.
특히 서유럽의 아리안계는 동양에서 유래된 화약과 나침반을 개량하고 총과 대포와 범선을 만들어 소위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Age of Exploration, 15c 후반 - 18c 중반)’를 열고 18세기 중반부터는 산업혁명을 이루어 세계사의 주역으로 도약하였습니다. 가여운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 인디아와 동남아시아, 무엇보다 북남‘아메리카’ 신대륙이 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여 교활한 협잡과 살인기계, 그리고 그들이 몰고 온 전염병 앞에 속수무책으로 스러져갔습니다.
앵글로아메리카의 잡탕 같은 ‘피섞임’은 차치하고, 라틴아메리카의 백인과 인디언 간의 ‘메스티조’, 백인과 흑인 간의 ‘물라토’, 인디언과 흑인 간의 ‘삼보’만 보아도 인간사 몇 백 년의 침략이 가져온 결과는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우연의 산물인지 곱씹어보게 합니다.
역사상 유럽 코카소이드의 피부색이 황색계열로 바뀔 뻔했던 경우가 몇 있었는데, 먼 과거의 황금제국 스키타이는 차치하고, 그 첫째가 ‘신의 징벌’ 훈(Hun)족의 말발굽입니다.
서기 375년 이래 동서로 갈린 로마제국을 핍박하고, 흑해 주변에서 북해와 아드리아 해까지 동유럽의 100여개 도시들을 살육하고 쓸어버렸던 아틸라(Attila, 406-453)의 50만 대군은 451년, 랭스, 스트라스부르, 트리어, 쾰른 등의 독일 대도시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프랑스 지경으로 진입하여 메스를 지나 파리로 진군하다 오를레앙 성에서 멈추게 됩니다.
파리 북동쪽의 평원, 샬롱에서 벌어진 카탈라우눔 전투(Battle of the Catalaunum Plains, 또는 샬롱 앙 상파뉴 회전)에서 서(西)고트의 테오도리쿠스와 연합한 서로마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Flavius Aetius)는 피가 강처럼 흘렀다는 이 결전에서 아틸라를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지만 서고트족의 동향이 의심스러워 군세를 거두고 말았습니다. 만약 전투가 훈 연합세력의 승리로 끝났다면, 그리고 2년 후 아틸라가 ‘일드리코’라는 독일 귀족의 딸과의 초야(初夜)에서 급사하지 않았다면, 유럽은 대서양 연안까지 초토화되고 서, 동로마의 지중해까지 ‘검은 머리털 유목 야만인’들의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음은 732년의 투르 프와티에 전투(Battle of Tours-Poitier)인데,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의 에스파냐 총독 ‘아브드 알 라흐만’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아키텐과 보르도를 폐허로 만들고 투르를 거쳐 프와티에를 향해 진군하자, 메로빙거 조의 프랑크 왕국의 재상으로서, ‘망치’라는 별명의 카를 마르텔이 노르만과 동부 게르만 군대까지 동원한 3만 중무장 도끼부대로 무어인 경기병과 투창부대, 궁병을 물리치고 알 라흐만까지 전사시켰습니다.이 때 무슬림이 승리했다면, 유럽은 피부색은 희되 검은 머리의, 오늘날 스페인 같은 다양한 인종들이 주류인 이슬람 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편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은 카롤링거 왕조를 세워 프랑크 왕국을 열고 그의 아들 샤를마뉴 대제는 정복전쟁으로 서유럽의 대제국을 이룬 후 서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카를, 카롤루스, 칼, 샤를, 찰스의 어원이 된 그 카롤링거 제국 말입니다.
고선지(高仙芝) 장군의 751년 탈라스 전투는 당나라군과 이슬람 아바스 왕조의 아랍-투르크 군과의 싸움이었으니, 몽골로이드 전사들이 피부는 희지만 검은 수염의 아리안 셈족에게 패한 셈이네요. 그러나 그의 군대가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카자흐 초원을 지나 우랄 강과 돈 강을 건너 우크라이나 초원을 지나 실크로드의 종점 헝가리 평원 언저리에서 당의 족쇄를 끊고 고씨(高氏) 왕조를 새로이 열었더라면 어찌되었을까요.
843년 서유럽은 베르됭조약에 따라 카롤링거의 중앙집권 프랑크왕국이 세 나라로 분열되었고 동쪽에는 비잔티움 동로마제국이 건재하였으나, 11c 말에서 13c 말까지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관여한 십자군 전쟁의 와중에 동쪽 멀리 유라시아 몽골 초원에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납니다.칭기즈칸(Chingiz Khan, 1206-1227)이 몽골초원을 제패하고 서하와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뒤, 카스피 해 동쪽까지 세력을 넓힌 이슬람의 호레즘 샤왕조를 멸망시키고 수명을 다했으나, “땅 끝까지 정복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셋째 아들 오고타이 칸은 쿠릴타이를 열었고, 1235년 조카 바투에게 백전노장 수부타이를 붙여 서방 원정을 보냅니다.
중앙아시아에서 카스피 해와 흑해연안, 그리고 헝가리 평원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스텝지대는 몽고마들에게 고속도로나 다름없었습니다.
광활한 러시아 평원의 모든 도시들은 지도상에서 사라질 정도로 처참하게 궤멸하였고, 이후 200여 년 동안 슬라브 족 러시아는 킵차크한국의 철저한 압제 하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1241년, 5만의 슐레지엔과 폴란드 그리고 튜턴 기사단의 연합군도 폴란드 서남쪽 레그니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몽골 별동부대의 지휘관, 카이두의 유인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맙니다.
호전적인 마자르 족 헝가리도 사요 강 전투에서 바투의 본대와 정면 승부하였으나 수부타이의 전술에 속절없이 무너져 헝가리 평원마저 무인지경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게르만 서유럽의 차례였는데, 한 인간에 불과했던 오고타이 칸의 죽음에 따른 쿠릴타이 개최 전갈이 오자, 몽골의 대군은 썰물 빠지듯이 헝가리 평원에서 물러가고 맙니다.
몽골과 몽골에 패해 그들과 합류했던 몽골로이드 계의 여러 군병들이 서진을 계속하여 석성들을 파괴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든 주민들을 죽여 버리는 ‘인종청소’를 자행한 후, 고대 로마의 군사도시로부터 발전한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 눌러앉아 몇 백 년 강압통치를 이어나갔다면, 오늘날 서유럽의 인종조차도 빳빳한 검은 머리에 갈색눈동자 일색이었을 것입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폴레옹의 키에 대한 오해와 진실 (0) | 2019.02.23 |
---|---|
몽골제국과 햄버거 (0) | 2019.02.18 |
어느 인디언의 죽음 (0) | 2019.02.08 |
미란다 원칙 (0) | 2019.02.07 |
인류가 멸망한 다음에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0) | 2019.01.28 |